중국의 시가(詩歌)는 중국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며 동시에 모든 장르의 시원이며 뿌리다. 또 단지 문학이라는 한정된 범주에서만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에게 있어서는 언어 자체가 시로부터 구어화되어 나타난 의사표현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국시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당시(唐詩)를 떠올린다. 물론 당시는 중국문학과 문화의 가장 귀중한 유산이며, 당대(唐代)의 문화와 생활 등 다양한 면모를 담고 있다. 당대를 지나 송대(宋代, 960~1279)에 이르면 당시와 함께 중국 시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詞)가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송대 약 300년 동안 2만 수의 작품이 지어졌고 송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가 되었다. 사는 악곡에 맞춰 지은 시가로 노래의 가사 부분을 지칭한다.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예법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방식으로 즐겨 부르던 가요다. 송사(宋詞)를 대표하는 유명 작품들을 감상하며 천년 전 노래 가사인 사(詞)의 매력에 빠져본다. [편집자註]   念奴嬌 염노교 赤壁懷古 적벽을 회고하며niàn nú jiāo chì bì huái gǔ 蘇軾 소식 Sū shì大江東去, 長江(장강)이 동쪽으로 흘러가며dà jiāng dōng qù浪淘盡、千古風流人物. 물결이 천고의 풍류 인물들을 다 쓸어버렸구나.làng táo jìn、qiān gǔ fēng liú rén wù故壘西邊, 옛날 보루 서쪽은 gù lěi xī biān 人道是、三國周郞赤壁. 사람들이 말하길, 삼국시대 周郞(주랑, 주유)의 적벽이라네.rén dào shì、sān guó zhōu láng chì bì亂石穿空, 삐죽한 바위는 하늘을 찌르고,luàn shí chuān kōng驚濤拍岸, 놀란 파도는 강 언덕을 치며,jīng tāo pāi àn捲起千堆雪. 천 무더기 흰 물보라를 말아 올리네. juàn qǐ qiān duī xuě 江山如畵, 강산은 그림 같은데,jiāng shān rú huà一時多少豪傑. 한때 얼마나 호걸이 많았던가.yì shí duō shǎo háo jié 遙想公瑾當年, 멀리 周公瑾(주공근, 주유)의 그 시절을 생각하니,yáo xiǎng gōng jǐn dāng nián小喬初嫁了, 小喬(소교)가 갓 시집오고,xiǎo qiáo chū jià liǎo雄姿英發. 웅장한 자태에 재주가 뛰어났었지.xióng zī yīng fā 羽扇綸巾, 깃털 부채 들고 비단 두건 쓰고, yǔ shàn guān jīn 談笑間、强虜灰飛煙滅. 담소하는 사이, 강대한 적 들의 배는 불에 타 없어졌다네. tán xiào jiān、qiáng lǔ huī fēi yān miè故國神遊, 고국을 생각하니,gù guó shén yóu多情應笑我, 다정한 이들 틀림없이 나를 비웃겠지, duō qíng yīng xiào wǒ 早生華髮. 흰 머리카락이 일찍도 났다고.zǎo shēng huá fā 人間如夢, 인생은 꿈과 같으니,rén jiān rú mèng一尊還酹江月. 술 한 잔 따라 강물 속 달에 뿌려보네.yì zūn huán lèi jiāng yuè   적고 옛일을 회상하는 역사감(歷史感)이 녹아있고, 하단은 옛 “풍류인물(風流人物)”의 회고를 적었다. 소식은 세차게 흘러가는 양자강을 묘사하고 당시 적벽의 형세를 그려보면서 그때의 호걸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강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고 말한다. 그 호걸들 가운데 재능이 출중하고 위풍당당한 주유(周瑜)와 함께 아름다운 소교(小喬)를 등장시켰다. 사실 적벽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교가 갓 시집을 간 건 아니다. 적벽대전은 건안(建安) 13년(208)에 일어났으며, 건안 4년( 199)에 주유는 소교와 혼인했다. 소동파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소교가 갓 시집갔을 때를 생각하며, 늠름한 총수가 신혼생활을 보내며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주유의 인생득의(人生得意)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술로써 역사 속 호걸들을 위로하고 또한 역사 속 인물이 될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 소동파는 주유와 달리 더 이상 자신의 이상을 실현 할 수 없어 현실에서 술을 빌려 근심을 덜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소식이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격을 받은 후에 적은 것으로, 쌓여가는 마음속 불평과 사무침을 풀어낼 곳이 없어 회고의 방식을 빌려 불만을 털어놓았다. 의기양양하고 호방하며 침울하면서도 웅장한 예술 경계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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