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애들 집에 개로 태어나면 좋겠네. 핥고 빨고 씻고 닦고, 아침 저녁 운동시키고, 품에 안에 재워주니…….” 어르신들의 우스갯소리다. 토를 달 게 없다. 단박에 이해가 된다. 다만 저 ‘농담’에 깃든 상실감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반려견이 가족의 중심을 꿰어찬 지 오래다. 아이보다 더 보살피고 어른보다 더 대접한다. 반려견을 아끼고 사랑하는 걸 넘어서 중독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런 이들은 게임에 중독된 사람이나 진배없다. 반려견에 푹 빠져 지낸다.    노년층의 소외감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조선 후기 방랑 시인으로 활약한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나이 든 이의 설움을 노래한 적이 있다. ‘젊은이는 까닭 없이 뒷전으로 따돌리고’ ‘허기진 창가 입맛은 살았는데’ ‘어린아이 돌보는 일 힘드는 줄 모르는가! 빈둥빈둥 노신다고 자꾸 갖다 맡기네.’   21세기 노인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까닭 없이 뒷전으로 따돌리고 어린아이 맡기는 건 똑같다. 다른 부분은 ‘반려견’이다. 조선 후기 노인들이 ‘개보다 못한 대접 서러워 못 살겠네’ 하고 푸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땀 흘려 일하는 젊은이들이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부러워했다.   김삿갓의 시구 중 ‘허기진 창가 입맛은 살았는데’는 ‘나도 입맛이 애들 못잖은데 내 식비는 강아지 간식비에도 못 미치고’쯤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21세기 어르신들은 조선 후기의 노인들보다 더 서럽다.   맹자는 “내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어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한다면 천하를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어른에 대한 공경과 자녀 사랑은 공동체적 사고와 어른스러운 태도로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올바른 사회상의 시작점이 어른 공경과 자녀 사랑인 것이다. 강아지는 다르다. 강아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사회로 확장되지 않는다. 강아지는 주인이 어떤 사람이든 밥 주고 놀아주면 좋아한다.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할 때 필요한 깊은 사고와 도덕적 판단, 공동체성이 필요 없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치고 선인이 없지만, 동물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어른을 ‘피터팬’이라고 한다. 어른을 공경하지 못하고 아이 대신 반려견을 선택하는 사회는 결코 어른스럽지 못하다. “개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말을 농담이나 나이 든 이들의 신세 한탄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우리 사회를 향한 뼈아픈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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